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9월~10월 ==== 홍산대첩 이후 왜구가 다시 나타난 것은 그 해 9월이었는데, 왜구는 현 [[전라북도]] 고부군, [[정읍시]], [[고창군]], [[김제군]] 지역을 연이어 공격했고, 이에 [[조운선]] 이동이 불가능해지자 기왕 이렇게 된거 전라도와 경상도 연해 주군(州郡)의 요역과 세금을 차등을 두어 면제 해 주는 정책이 실시되기도 했다. 또한 전주를 침략한 왜구와 싸운 유실은 처음에 패배하여 위급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으나, 이후 김제 귀신사(歸信寺)[* 신라 문무왕 때인 [[676년]]에 지어진 사찰로 지금도 남아 있다.]에 주둔한 왜구를 급습하여 [[진땀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 후 왜구가 현 군산 지역인 임피현(臨陂縣)를 공격하여 다리를 끊어버려 수비하고 있자, 유실은 몰래 다리를 만들어 적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도지휘사(都指揮使) [[변안열]](邊安烈)이 안렴사였던 이사영(李士穎)을 시켜 매복하게 했는데 이 작전이 어설퍼 왜구에게 들켰고, 곧바로 왜구가 반격을 가하자, 패배하여 유실은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10월에는 왜구가 진포(鎭浦)를 공격했고, 강화부를 침공하여 고려군의 병선을 불태웠다. 이때 한주(韓州)에서 최공철이 왜구 100여명을 죽이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 50여척의 왜구 함대가 현 [[전라남도]] [[부안군]]인 부령현(扶寧縣)을 노략질 하면서 다리를 부셔버리고 고려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자, [[변안열]], [[나세(조선)|나세]](羅世), [[조사민]](趙思敏) 등은 밤 중에 다리를 놓고 기습하여 왜구를 공격했다. 그러자 무려 천여명이 넘는 왜구의 보병과 기병은 근처의 행안산(幸安山)에 올라가 버텼는데, 고려군은 사방에서 이를 공격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11월에는 왜구가 경남 거제로 공격해 오고, 함안(咸安)ㆍ동래(東萊)ㆍ양주(梁州)ㆍ언양(彦陽)ㆍ기장(機張)ㆍ고성(固城)ㆍ영성(永善) 등을 모두 노략질 했다. 또한 진주가 공격 당했고, 밀성이 공격 당했다. 12월에는 합포의 고려 군영이 공격 당했으며, 의창(義昌)ㆍ회원(會原)[* 합포성은 현재의 창원시 마산회원구의 중심지이며 회원현은 회원동 일대, 의창은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일대이다. 즉 이 세 지역은 붙어 있으며 합포는 고려 말 경상도 남부의 중심지였는데도 이렇게 자주 털린 것이다.]ㆍ함안ㆍ진해ㆍ고성ㆍ반성(班城)ㆍ동평(東平)ㆍ동래ㆍ기장 등 동남쪽 지역의 현들이 모두 노략질 당하고 백성들이 학살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원수로 있던 사람은 [[김진]](金縝)이라는 인물이었는데, 이 사람은 김횡 같은 막장으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막으라는 왜구는 안 막고]] '''기생 중에 얼굴 예쁜 사람들을 모아다 날마다 군중에서 부하들과 놀기만 했다.''' 이에 사람들은 김진이 [[소주]]를 좋아한다 해서 김진의 무리들을 '''소주패'''라고 불렀다. 이 소주패의 김진은 군졸과 부장들을 때리고 욕하며 [[똥군기]]를 잡았는데, 이후 왜적이 오자 김진이 싸우려고 해도 지휘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병사들은 '''"우리를 보내지 말고 소주패를 불러서 싸워봐라."'''라는 태도로 나왔기에 대패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김진은 패배한 죄명으로 평민이 되어 가덕도(嘉德島)에 유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